이변은 원래 예상할 수 없게 일어나는 거라지만, 변하지 않으리라 굳게 믿었던 세상이 흔들리는 것은 사람에게 큰 충격을 주는 법이다. 세상이 고작 이딴 이유로 흔들려도 돼? 하고 다들 말할 테지만, 세스에겐 세상의 종말보다 지암의 변심이 더 세상을 뒤흔드는 일이었다.
그랬다. 항상 자신만을 좋아할 것 같던 대장에게 말 그대로의 이상형이 나타났다. 이전에도 몇 번 물어봤을 때 들었던 대답과 크게 다르지 않은 남자다. 그나마 자신의 취향에 근접한 건 샤슈 씨라고 했던가, 대장의 마음에 새로 들게 된 이 위르트라는 양반은 그와 조금 닮았을지도 모르겠다. 일단은 저 아저씨는 신인이라 잘 알지는 못하지만, 외형은…. 조금 자만한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샤슈 씨의 풍채와 외견에 자신의 흐트러진 느낌을 합친 것 같았다. 평소 같았다면 그래도 날 좋아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을 텐데. 자신처럼 가볍게 추근대는 사람도 아닌 대장이 저 앞에서 다른 남자를 칭찬하고 있으니, 위기감이 확 든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아…. 진짜 존나 잘생겼어…. 담배를 피워도 멋있고 칵테일 섞을 때가 장난 아니야. 나 진짜 태어나서 그렇게 잘생긴 사람은 처음 본다니까. 내가 하면 담배를 피우는 것도 술 마시는 것도 술 섞는 것도 다 중독자의 필사적 갈구인데.”
“아니, 뭐랄까…. 그 사람 좀 악마 같은 인상 아냐? 대장 악마한테 꼬드김 당하는 거라고?”
“그렇게 잘생긴 악마가 날 친히 꼬드겨준다면 얼마든 속아 줘야지.”
“아니, 그….”
장난치듯 말했으니 장난치듯 대꾸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지만, 타들어 가는 속도 모르는 건지 조금 야속했다. 하긴, 대장은 뭘 하든 피해서 이야기하는 건 싫어했다. 본인이 사람 마음을 잘 모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러나저러나 곧고 직진뿐인 사람이라니까.
“아, 대장. 계속 그렇게 내 앞에서 다른 남자 얘기만 하면 나 속상하다?”
여전히 장난기가 살짝 섞인 말투로 그렇게 말하자 지암의 표정이 급격히 굳었다. 화난 대장의 얼굴은, 솔직히 말하면 진짜로 무서웠다. 웬만한 일로는 화를 내야 할 터인데도 화내지 않는 대장이기 때문에 더 그랬다. 그는 자기와 관련된 감정은 언제나 무디기만 하고, 괜히 아련한 감정이 들게 하는 사람이라서…. 그런 사람이 이렇게 화낸다면, 분명 그건 세스의 잘못이었다. 단 한 번도 아닌 적이 없었다. 두 사람의 관계에서 지암의 잘못이 있다면, 그건 정말로 세스를 너무 받아줘서 뿐일 게다.
“그럼 나는?”
싸늘한 시선은 눈을, 싸늘한 말은 귀를 꿰뚫고 들어와 등골을 서늘하게 했다. 그래, 그렇지. 이 주제에서 세스가 서운하다고 말하면, 이 반응이 당연한 거였다. 그렇지만, 그가 너무 받아줘서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해버렸다. 짧은 사이. 긴장감으로 입안이 말랐다.
“애초에 우리가 사귀지 않으니까, 라는 이유로 너는 내 앞에서마저 남에게 집적거리던 게 아니었나? 냉정하게 말해서, 서운하고 자시고 할 사이이긴 해?”
“그, 그렇지…. 맞아, 응….”
머쓱하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이렇게 사람을 압도할 때면, 대장이 세스 자신과 그를 둘러싼 세상을 얼마나 봐주고 있는지 새삼 느꼈다. 약한 소동물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성격이 나쁘다고 하던데 지암은 그 정반대라고 하면 좋을 것 같았다. 아마 대장에게 말 그대로의 “자신”이 없는 것은, 그걸 가지고 있는 그가 당연히 신과 맞먹기 때문일 테다. 적어도 세스는, 신관으로서 조금 불경한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기에 자기 앞에 있는 이 사람이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온 나의 신이라고도, 생각했다.
그렇다는 대답으로 대화가 마무리된 뒤로, 그들은 더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변명을 하고 싶어도 이제는 늦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그 대화는 종결되었으니까. 물론 지암은 말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면 언제든 지나버린, 혹은 묻어버린 대화를 수면 위로 꺼내는 사람이지만, 세스는 그런 유의 성숙한 대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를 만나지 않았다면 아마도 평생 하지 못했으리라는 것도 분명했고 말이다.
“…썅. 쓸데없이 화내려던 게 아니었는데.”
‘쓸데없이’라니, 너그러운 것에도 정도는 있다고 생각하는데. 지암의 독백에 세스가 대답했다.
“그렇지만 그렇게 화내면 꼭, 이젠 지긋지긋하니 그만하자는 것처럼 들리잖아.”
…하는 말로 시작된 대장의 솔직한 사과는 꽤 오랫동안 이어졌다. 내 욕심인 걸 알지만, 우리가 어떤 결말을 맞이하든 나는 우리 사이가…. 세스는 또 그를 상대로, 욕심이 아니야, 많이들 그래, 하며 매일 하는 일을 하듯 대답해주었다. 누구나 현 상태가 유지되기를 바라지, 무너지길 바라진 않아…. 그건 지금 자신의 세상이니까. 욕심부린다고 자책할 필요도 없고 나한테 사과할 이유도 더더욱 없어. 대장은 잘못하지 않았어…. 하여튼 오락가락하는 거로는 둘째가라면 또 서러울 사람이다. 본인이 가장 피곤하겠지 싶어 괜히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웃어 보이는 것으로 안심시켰다.
다만 지금 자신은 조금 다른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는 말은 그에게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뻔뻔하게 그에게 나는 우리만이 이어지길 바란다고 말해버리면 그는 또 그걸 들어줄 테니까. 이건 대장이 온전히 자신의 마음만으로 결정하기를 바라서 하는 배려이기도 했고, 동시에 대장이 진심으로 자신만을 사랑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내린 이기적인 결정이기도 했다.
흔들리던 일상은 또 언제나 그랬듯이 대장의 사과로 갈무리 지어졌다. 정말이지, 이딴 식으로도 괜찮은 거냐고 많은 사람이 묻겠지만, 대장은 괜찮다고 대답할 것이 분명했다. 그의 이런 태도 덕분에 흔들리지 않는 입장에서는 “제발 그러지 말아라”하고 타이를 수도 없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