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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영원한 7일의 드림

사제의 재회

  이런, 지암. 나의 못난 제자. 내가 너를 잘못 평가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구나. 성숙한 신의 음성이 머리에서 울려 퍼졌다. 입을 열지 않고도 말할 수 있다는 것처럼 차분하게 웃고 있는, 만물의 어머니로 보이는, 그분.

  “아…. 오랜만이에요, 선생님. 선생님은 낙제생이 재능을 보이는 건 영 좋아하지 않는 타입일 텐데, 어쩌지?”

  그리고 바로 그 앞에, 작고 연약한, 어린, 미숙한, 너무나도 인간적인, 나의 신이 서 있었다. 모든 기억을 가지고, 원래 하자품이었기 때문에 부서질 수 없는 상태로. 만물의 어머니, 내 불효의 수신자, 그녀가, 불쾌한 듯이 지암을 바라본다.

  “솔직히 예상 밖이었단다. 평범한 인간은 자신의 모든 다중우주 속 기억을 머리에 넣고 정신 멀쩡하게 서 있을 수 없으니까. 하긴, 그 몸의 너는 그리 정신이 멀쩡하지도 않구나. 그게 원인일까? 네 다중-시공간-인지능력이 정말로 뛰어날 거라는 생각은 여전히 들지 않는걸.”

  아니, 그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니! 방어기제까지 처참히 고장 난 탓에 기억을 잊지도 못하지만, 술에 의존해서 어떻게든 그 하찮은 인간의 머리로 다중우주의 기억을 정리하는 데에 성공하는 이레귤러가 나타난다니. 널 지켜주려 기억을 빼앗으려고 해도 영 내놓지를 않고 말이야. 너한테는 두손 두발 다 들었단다, 아가. 모형정원을 프로그램하는 능력이 그렇게 형편없는데 본인의 뇌로 고차원 연산은 또 가능하게 할 줄은 몰랐지 뭐야. 의외로 보안도 뛰어나고?

  “기껏 존댓말이라도 해주면서 체면 세워주고 있었더니, 씨발. 신도 앞이니까 점잖은 척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비위 맞춰주는 건 예나 지금이나 좆같이 어려우십니다. 난 미치지 않고도 모든 걸 기억하고 있는데, 그걸 잊게 하려고 직접 행차해주시는 스승의 정에 눈물이 다 흐른다. 진짜….”

  우와, 성격 나왔다. 나의 신은 상대보다 훨씬 험악한 얼굴을 하고는, 나에게는 다가오지 말라는 것처럼 손짓했다.

  “여기 오면서 성격 비틀린 사람 속을 끝내주게 잘 알게 되어버려서 말이야…. 아이솔린, 당신은 이 모형정원을 없애고 싶겠지. 대답하지 않아도 알아. 나는 그, 영웅이 될 존재였던 이를 망친 당신을 목격했으니까. 내가 개입하기 전이라면, 분명 세라핌은 얼마 안 가서 포기했을 터였겠지. 영웅은 각본대로 활약해주지 않고, 세상은 부서지고, 싫증 나게 되어있었는데!”

  지암이 과장된 연기를 하며, 마치 고대 연극이라도 상연하는 것처럼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아무도 본 적이 없을, 만물의 어머니의 내적 절규를 흉내 내었다. 모든 일이 내가 세라핌에게 이상한 내기를 걸며 내려온 것에서 시작된 셈이지. 그의 차분한 설명처럼, 모든 상황이, 인과가, 윤회가 나의 연약한 신을 축으로 돌며 그를 향하고 있었다. 단지 ‘널 도와주겠다’는 선의에서 시작된 그의 모든 불행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오히려 희극 같은 이 상황이, 얼마나 잔인한지! 그런데도 지암은, 혼자서 내려와 모든 것을 책임지는 그 신은 의연했다.

  잊지 않고 모든 기억이 모이면, 나는 분명히, 그리고 인간들은 분명히, 흑문을 없애고 재앙을 극복할 방법을 찾을 수 있는 게 맞지? 미쳐버리지 않게 하는 것만이 목적이라면 날 건드릴 필요가 없어. 하지만 내게 쌓이는 경험적 지식이 목적이라면, 그렇다면 말이야. 그러면 직접 불완전한, 형편없는 몸에 강림해서 막을 필요가 있겠지. 어때, 은혜로운 나의 선생님. 이만큼 이해했다면 나와 내가 사랑하는 이들의 모든 기억이 단지 “미치지 않게 하기 위해” 삭제된 거라고 말할 수는 없지?

  —모든 것의 어머니께서는 경멸하듯 지칠 대로 지친 그를 웃으며 내려다보시었다.

  “그래, 잘 아는구나. 상황 파악은 빠르고 오지랖만 넓은 건 여전한걸. 지암, 네게 이 전투가 전혀 의미가 없다는 것도 알지? 그리 가깝지도 않은 친구가 슬퍼한다고 모형정원엘 내려오고, 자길 이용해먹으려는 인간들을 위해서 매주 목숨을 갈아 넣고, 지금은 ‘본인이 잊지 않은’ 기억을 되찾기 위해 내 앞에 서 있지. 어쩜 이리… 바보 같은 아이일까요.”

  마치 우리를 조롱하는 것처럼, 저런 대사를 뻔뻔하게…. 대장이라면 불같이 화낼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돌리자, 오히려 상대보다 냉정한 표정으로 뻔뻔하게 서 있었다. 비웃음을 흘리며, 말한다. 나를 도발하기 위해 모자란 인간의 대사를 따라 하는 것밖에 못하는 형편없는 스승이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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