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의 Keyword: 서툰, 어설픈, 새로 시작하는, 1.
Cup의 Keyword: 감정, 사랑.
1. 착각 1
"그 사람은 당연하게 해냈을 것들을 나는 당연히 하지 못할 거라고 얕봐주시는 게 좋았어. 그건 내가 그 사람이 아니라는 걸 믿는 동시에 나를 너무나 모자라서 곁에 둘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착각해주시는 거였으니까."
아마 뭐든 내가 그 사람보다는 잘하겠지만, 하고 그는 쓸쓸하게 덧붙였다. 이야기는 멈추지 않고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내가 죠타로를 왜 싫어하는지 알아? 나는 미완성된 완전체인데 그 녀석은 아니잖아. 걔한텐 무엇이든 쉽지, 완벽하고. 나도 어렵지는 않아, 제법 잘하지. 근데 나는 빼어나 본 적은 없어. 모든 것에 애매한 수준만큼의 재능만 있다면 사는 건 완벽한 것보다 더 재미가 없어. 뭘 해도 딱 이 정도지. 노력을 하나 안 하나 비슷하고, 남들보단 조금 더 뛰어난 탓에 너네 같은 녀석들 앞이 아니면 말도 못 해. 이게 무슨 재능이야? 그냥 아무것도 없는 거지. 내 모든 재능의 한계가 어느 정도까지고 나는 오만 능력을 가지고도 딱 하나만 잘하는 것을 못 해서 어떤 분야에 발을 뻗어도 밥벌이나 하면서 겨우 살 텐데.
내게 필요했던 건 너는 무능력하지 않다고 말하는 평범하고 쓸모없는 인간들이 아니라, 내가 무능력하고 지켜줘야만 하는 한심한 인간이라고 진짜로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압도적인 존재였지. 압도적이고 완벽한 사람도 평범한 사람도 이딴 어중간한 인생을 이해할 수는 없잖아. 나는 누가 나를 이해해주기를 바라는 게 아니었고."
슬픈 건지 공허한 건지 알기 어려운, 그 특유의 눈빛이 상대를 향했다.
"... 살고 싶은 이유가 되어줄 것들이 없어. 나아지고 싶다는 사소한 마음마저 가질 수가 없더라고. 이제는 주인마저 잃었고.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오래 살았어."
2. 착각 2
"확실히 말해둘게. 나를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지켜줘야만 하는 존재'라고 얕보고 착각해도 되는 건 내가 죽을 때까지 DIO님뿐이야. 주인 이외의 존재에게는 애완동물도 무엇보다 공포스러운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걸 명심해둬. 완벽하지 않아도 치명적일 수는 있다는 진리를 몸으로 뼈저리게 느끼고 싶은 게 아니라면 말이야."
3. 1999년 그 첫 번째
"10년도 더 지났어, 지암. DIO에 대해... 이제는 어떻게 생각해?"
"5년쯤 지났을 때도 물어봤었지, 그거. 그때 내가 뭐라고 대답했더라?"
"어떤 마음인지는 모르겠지만 여전히 보고 싶다고."
"...... 젠장, 솔직하게 말할게. 10년이 넘게 지났지만, 여전히 보고 싶고 사랑하고 있어. 단 한 순간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었어.
제일 문제인 게 뭔지 알아? 그 생각만 하면 돌아버리게 괴롭다는 거야. 사랑하고 있다는 자각을 했을 때 느꼈던 고통보다 더 끔찍해. 보통 사람들도 누군가를 잃을 때마다 이렇게 아파? 어떻게 혼자 살아서 자기 인생을 꾸린다는 거야? 나는 한 명만으로도 수시로 숨이 막히고 심장이 조여오고 가슴이 아프고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떨어지려고 하는데. 사랑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뜨겁고 심장을 누가 쥐고 있는 것처럼 답답해서 정신이 혼미한데, 이젠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실감할 때마다, 이 더럽게 밝은 저택의 조명을 볼 때마다 내 안에서 무언가 찢어지고 있는 것 같아.
존나 그냥 죽어버리고 싶어. 그런데 한편으로는, 봐. 한심하게도 나도 인간이라서 사랑하는 이가 어느 날 밤이면 이 저택에 유유히 걸어 들어와서 나를 데리고 나가주길 바라지. 그딴 꿈을 10년이나 꾸고 있는 내가 한심해. 문을 열면 너와 말다툼을 하는 그분 목소리가 들릴 것 같고, 어느 날 창문을 두들겨 나를 기쁨으로 놀라게 하실 것 같고, 어떤 날은 아예 눈을 뜨면 그곳이 너네 집이 아니라 그분의 저택이었으면 좋겠고.
너무 늦기 전에 자살해둘 걸 그랬어. 너네가 그분을 죽였을 때 염병할 저택 탑에서 뛰어내릴걸. 차라리 그랬으면 그분도 기뻐했겠지. 이젠 또 죽기엔 너무 늦은 것만 같아. 나는 왜 살아 있는 걸까? 일찍이 흡혈귀가 되었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분 없이 혼자 영원히 살 바에야 지금이 낫다고도 생각해. 한편으로 햇빛만 받으면 불타고 바스러져 사라지는 흡혈귀 쪽이 인간보다 죽기 훨씬 쉬울 것 같다고도 생각하고."
"나는 너네가 그 녀석을 왜 그렇게 좋아하는지 정말 모르겠어. 그 애도 그랬어, 평생을 그 녀석만을 자기가 사랑했던 사람으로 남겨둔 채로 지내다가 숨을 거뒀지."
"나도 모르겠어. 내가 이렇게 절박하게, 절망적으로 사랑을 해보게 될 줄도 몰랐는데, 그 이유는 어떻게 알겠어? 전에는 단지 내가 그분 옆에 있으면 안심이 되니까 사랑하는 줄 알았지, 근데 10년을 그분 없이 살면서도 그리운 걸 보면 그게 아니었던 것 같아. 너무 늦었어, 나는 너무 오래 살았고. 어떡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그냥... 그냥 울고 싶어. 차라리 사후세계라도 믿을걸. 그랬다면 내가 죽으면 그분 곁에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편하게 죽을 수 있었을 텐데."
4. 1999년 그 두 번째
"더 한심한 게 뭔지 알아? 시간이 이렇게 지나고서도 나는 아직도 내가 그분의 소유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거야. 내 생사여탈권은 당연히 내 주인에게 있으니, 나는 죽고 싶어도 멋대로 죽어서는 안 돼. 병마도 나를 데려가서는 안 되고. 진짜 존나 한심하지, 바보같고. 매일 그분은 내가 죽기를 바랄지 살기를 바랄지 고민하고 있어. 내 인생이 당신 없는 곳에서 지속되는 건, 그것도 특히 네 옆에서 지속되는 것만큼은 바라지 않을 것 같긴 해. 근데 나는 이게 내 삶인지도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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