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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죠죠의 기묘한 드림

애완용 인간

이집트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이었던가, 어쩌다 그럴 기분이 들어 먹이를 꼬이는 대신 시장을 구경하다 발견한 것이 녀석이었다. 딱 봐도 관광객에 불과하다는 것이 분명한, 작은 체구의 여성으로 보이는 인간. 여자로 보이는 인간이 이집트에서 저런 차림새로 혼자 돌아다닌다, 라. 카이로야 유명한 관광지인 만큼 비교적 안전하다지만... 시장에서는 다른 문제지. 아니나 다를까 상인들에게 '돈 많은 외국인 여자'로 찍힌 듯, 사방에 상인이 둘러싸인 채 호객행위에 시달리고 있었다.
내겐 중요한 일도 아니니 무시하려 고개를 돌린 순간, 녀석에게서 무언가를 보았던 것 같다. 언젠가 본 적 있는 것만 같은 얼굴에는 지독한 무감정이 서려 있었고, 나는 그것에 눈길을 사로잡혔다. 나쁘지 않은 아랍어로 '내게 말 걸지 말라'는 의사를 표현했으나 무시당하자, 곧 그 얼굴에는 포착하기 힘든 짧은 순간 증오와 경멸이 스쳐 지나갔다. 아무 생각 없이 돈 갖고 관광이나 온 것처럼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재밌는 녀석이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 시선을 잠깐이나마 뺏을 수 있었으니 어울려줘도 나쁘지 않겠지. 상인들을 가볍게 제치고 다가가 기다렸느냐며 능청을 떠니 곧 모두 흩어졌다. 녀석도 일행인 양 태연하게 웃으며 한적하지만 인공광 정도는 비치는 골목 어귀로 나를 이끌었다. 그리고는 고맙다며 말을 걸어왔다. 지암, 이라고 불러주면 된다면서.
내 귀에 들린 것은 어렸을 적 그렇게나 싫어해 뜯어고친 고향 런던의 말씨와도 닮았고 한편으로 고상한 엘리트들이 쓰던, 나도 체화하게 된 말씨와도 닮은, 익숙한 억양이었다. 애써 주인에게 적절한 말씨로 대답하려고 애쓰던 리에게서 종종 들을 수 있었던 그것. 마치... 그래, 그 녀석이 돌아온 것만 같은 얼굴과 억양에 나는 순간 세상이 멈춘 줄 알았다. 교육을 받다 만 것만 같은 어중간한 말씨가 이젠 Estuary라고 불리게 되었단 사실은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매번 나의 눈길을 사로잡는 그들은 너무나 닮았지만 동시에 전혀 달랐다. 자신을 국적 불명의 이름으로 칭하는 그들. 태어난 날은 1월 14일, 무성의 정신, 공허한 눈빛. '리'가 나를 위해 다시 주어졌다는 착각을 할뻔했다. 그러나 '지암'은 모든 것에 어설프게 능숙했으며 그렇기에 만사가 장난과도 같았다. 아무래도 감정도 그랬던 모양이었다.
짧은 어울림에 대화가 이어질수록 나를 바라보던 작은 인간의 심장은 다른 인간이 흔히 그러듯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나의 외모나 위압감 때문이 아니라, 마치 '자신과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난 것에 설렌 것처럼. 나로서도 녀석과의 대화는 즐거웠다. 이집트에 도착해 처음으로 나쁘지 않은 밤을 보낸 것에 흡족하기도 했고, 장난기가 들어 헤어지며 뺨에 입을 맞춰주었다.
며칠 뒤에 노파가 녀석을 저택에 데리고 왔을 땐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만남이란 정해진 운명이라고... 그날 이후 수일간 나를 찾던 녀석의 처분을 묻는 노파를 물렸다. 독대다, 지암. 너는 무슨 말을 할까. 다른 인간처럼 입에 발린 말을 하진 않겠지.
"무슨 일로 나를 찾았지?"
대답은 간단했다. 곁에서 당신을 사랑하게 해달라고. 연인이 되어달라는 건방진 요구도 아니요, 단지 탐하는 것도 아니라—그저 애완동물처럼 이곳에 두기만 해달라며. 내게 사랑을 고백하는 이는 얼마든 있었으나 이런 녀석은 확실히 처음이었다.
이 감정을 말하지 않으면 터져버릴 것만 같아 당신을 찾았다며, 똑바로 고개를 들고 눈을 마주쳐 고백해왔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아도 전혀 상관없으니, 하며 주절대는 모습이란. 사랑스러울 정도로 고분고분하지만 역겨울 정도로 비굴하지 않은. 그래, 애완동물을 키운다면 이 정도 동물이 좋겠다 싶은 녀석이었다. 그러마, 하고 대답하니 처음으로 지어 보였던 미소는 아직도 생생하다.
지금처럼 사랑스럽다 여기게 된 것은 언제, 무슨 까닭이었지? 들이기로 결정한 그 순간이었나, 언젠가 대화를 나누던 때였나, 독특한 재치였나, 아니면 사랑스럽게 웃는 얼굴이었나. 나를 사랑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공허한 인간이라. 지암이 그런 인간인 이상 시점도 까닭도 중요하지 않을 테다.
내가 사랑할 수밖에 없으며, 나를 사랑하도록 운명지어진, 인력에 끌린 나의 작은 애완용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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