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여느 때와 같은 여름날이었다. 시라유키 지아무는 또 아무런 연락 없이 키시베 로한의 집에 쳐들어와 빈둥거리고 있었고, 로한은 그런 그를 다소 신경 쓰면서 일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제 와서는 왜 왔느냐고 해도 새삼스럽고, 내쫓으려고 해도 마음먹고 버티면 누가 와도 못 내보낼 것이니 그냥 무시하는 게 로한으로서는 최선이기도 했고. 그마저도 상대를 완전히 무시하기 어려운 건 로한밖에 없는 모양이었는지, 로한이 눈치를 보는 내내 지암은 언제나 저 할 일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어이, 시라유키.”
“네엥?”
아니나 다를까 오늘도 멋대로 작업실 바닥에 뒤집어져서 책을 뒤적거리다가,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쪽을 향해 고개를 들며 멍청하게 대답했다. 뒤집어져서 고개를 들어봤자, 고양이나 강아지가 아니라면 귀엽지도 않은, 그저 바보 같은 모습이다. 언제나 묘하게 생기 없는 저 묘한 눈이 거슬린단 말이지. 다른 사람을 볼 때나 나를 볼 때나 변함없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 의뭉스러운 눈빛, 경계심도 거리낌도 없는 기분 나쁠 정도로 무방비한 태도며 괜히 친한 척 쉽게도 다가오는 것까지 무엇 하나 로한 자신과는 맞는 부분이 없는 녀석인데도.
“매번 작업을 방해하러 오는 이유가 뭐냐?”
“말했잖아요, 쌤을 좋아하니까~”
그 지점이 문제란 말이다. 로한은 쓰던 펜을 손가락으로 돌리며 몸을 틀어 지암을 향했다. 그래도 대화에 흥미는 생긴 모양인지 지암도 “그게 뭐가 문제예요?” 하며 몸을 뒤집어 엎드려 누웠다. 침대면 몰라도 왜 그렇게 방바닥에 눕길 좋아하는지도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지만, 로한으로서는 저런 태평한 모습이 더 거슬렸다. 왜 저 녀석은 그런 말을 하면서도 나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지, 그 점이.
“언제나 똑같이 귀찮게만 하고, 좋아한다는 말이라고는 이럴 때나 하고 말지, 네 녀석은. 나랑 있을 때나 다른 녀석들이랑 있을 때나 태도는 똑같고 말이다. 꼭 내가 내치지 못하게 하려는 핑계 같이 느껴진다고.”
“에엥, 쌤이 그런다고 마음 약해지는 사람이었어요?”
“이 자식이 진짜…. 지금도 또! 언제나 이런 식이잖냐! 날 좋아한다는 사람이 나한테 하는 말은 까칠하지, 행동도 평소와 별다를 것 없어. 태도가 변하는 것도 아니고, 전혀 나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단 말이다. 나도 팬이라는 게 있어. 날 좋아하는 사람들은 종류별로 만나봤지만, 너는 그 무엇도 아니잖냐.”
지암은 잠시 가늘게 뜬 눈으로 노려보다가 쌤은, 하며 입을 열었다.
"나한테 뭘 바라는 건데요? 말하지 않으면 몰라요."
그래, 그런 녀석이었다. 본인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전혀 모르겠지만, 남은 꼭 입을 열게 하는 제멋대로인 성격이 무지막지하게 열 받는 녀석이다. 자기 입으로는 생각을 다 말한다고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욱 모르겠는 때가 있는 법이다. 어쩌면 아예 깊은 생각이 없는 것일지도 모르지. 그런 점에서 지암은 남의 마음을 파헤치는 것이 특기이자 능력인 키시베 로한이 풀 수 없는 유일한 수수께끼였다.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게 싫긴 해도 그 마음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는데.
“젠장, 나는 네가… 진짜로 날 좋아하는 게, 그게 사랑이 맞는지 모르겠단 말이다. 어디로 튈지도 모르는 제멋대로인 성격이면서 다정해서 멋대로 남을 좋아하고 쉽게 친해져 버려. 덕분에 누구든 너한테 휘말릴 수밖에 없지. 그러니까 내 말은, 내가 너의 착각에 휘말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단 거야. 넌 누구에게나 친절해….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지만, 나는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 확신할 수 없다고.”
그 성격을 이기고, 쑥스러운 마음을 무릅쓰고 옅게 내뱉은 것은 제법 진지한 이야기였다. 네 고백 때문에 이제야 네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지만, 그렇게 될수록 너는 멀어져가는 것 같아…. 스무 살의 만화가는 유치한 면이 있긴 해도 확실히 어른이었지만, 이런 때만큼은 그저 그 또래의 소년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고작 두 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 청춘을 그저 이런 작은 동네에서 흘려보내기로 결정한 두 명의 이단자 소년.
딱히 사랑을 꿈꿔본 적도 없고, 원하는 것은 만화를 그리는 것뿐인 로한에게 올여름은 최고이자 최악의 여름이었다. 잊으면 안 되는 기억을 되찾았고, 기억과 함께 묻어둔 두려움이 되살아났다. 평범한 만화가는 절대로 얻을 수 없는 리얼리티를 얻었고, 분명 시라유키 지아무의 ‘사랑’도 그런 소재로서 멋지게 작품에 녹여낼 생각밖에 하지 않았는데, 어쩌다 이런….
“내가 쌤을 좋아하는 것보다 쌤이 나를 좋아하는 마음이 더 커질까 무서운 거예요? 아니면 내가 남들을 좋아하는 것과 비슷한 수준으로 쌤을 좋아하는 것일까 겁나는 거예요? 어느 쪽이든 내 사랑 이야기를 소재로 탐내는 사람이 하기엔 너무 바보 같은 걱정인데.”
“그런 대답이 듣고 싶어서 묻는 말이 아니란 말이다. 사람이 진지하게 말을 하면 본인도 진지하게 대꾸하지 못하겠냐!”
나도 나름 진지하게 한 대답이었는데 너무해, 하고 지암이 투덜거렸다. 그래도 로한의 다그침에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변해서는, 눈을 내리깔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사랑에 겁먹은 상대에게 하기엔 미안한 말이지만 어느 쪽도 자신은 장담할 수 없노라고. 키시베 로한의 마음에 멋대로 들어오려고 한 사람다운 대답이었다. 속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지독하게 솔직하고 숨기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어, 속마음을 멋대로 이해할 단서라고는 전혀 남겨주지도 않는, 이기적이고 치사한 상대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면 절대로 이런 사람만은 좋아하고 싶지 않은, 제멋대로의 인간.
“쌤 말대로 난 사람을 좋아하고 사랑에도 쉽게 빠져버려요. 날 좋아한다는 고백엔 매번 흔들리고, 한 번에 한 사람만 좋아한다거나 그런 것도 절대 못 하고. 언제 갑자기 쌤만큼, 아니면 그 이상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버려도 이상하지 않죠. 오쿠야스 군처럼…. 나도 그런 것쯤은 알고 있어요."
알고 있다니 그건 다행이군. 만화가가 부끄러워 물든 고개를 살짝 돌리고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말해두겠지만, 내가 널 좋아하는 마음이 네 마음보다 커지든 말든 그건 아무래도 좋아. 그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내 마음보다 넘치게 날 좋아하라'고 명령할 수는 없으니까. 감정은 산술적인 게 아니잖냐. 그걸 장담할 수 있었다면 오히려 거짓말이라고 했을 거다. 흥, 인간관계가 서툴다고 해도 너보다 두 살은 더 먹었으니 말이지?"
역시 서툴다니까. 어설프게 뽐내는 듯한 말에 못다 숨긴 본심이 배어 나오고 있었지만, 이번만은 놀리지 않고 모르는 척해주기로 했다. 정을 붙이지 않으려고 일부러 퉁명스럽게 대하는 건, 어쩌면 레이미 씨의 일로 너무나 크게 상처받았던 탓인지도 모르겠다고… 지암은 생각했다. 그래도, 남을 좋아하고 그 사람과 함께하는 건 행복한 일인데. 꼭 연인이 아니어도 말이야.
“물론 남들이 보기엔 누가 좋아해 주면 나도 그 사람을 좋아할 뿐인 쉬운 사람이겠지만… 나는 누군가가 날 좋아하는 걸 알아야 사랑에 빠질 수 있는 상대라고 인식하는 사람인 건데. 누구든 좋은 게 아니라, 원래도 좋아하던 사람을 '사랑恋'의 의미로도 좋아하게 되는 거라고요.”
그 말을 마치고 지암은 만화가를 지긋이 바라봤다. 마치 이 말에 무슨 대단한 비밀이라도 숨겨져 있다는 듯이, 무언가 단서를 찾아보라는 것처럼, 더 말을 잇지 않고. 오래 기다릴 것도 없이 만화가는 금세 작은 비밀 하나를 발견해 짚어냈다. 분명 다른 사람들에겐 별 대단한 일이 아니지만, 지암에게만은 특별한, 키시베 로한이 일으킨 어떤 이변 하나.
“… 난 네 녀석을 먼저 좋아한 적이 없어.”
그게 로한 선생님이 특별한 이유죠. 그가 경쾌하게 덧붙였다. 특별이라. 그저 맥이 풀려 헛웃음을 지었다. 고작 너는 다르다는 말에 마음이 어수선하게 들뜨는 게 더없이 우스웠다. 정신이 혼자 붕 뜨는 것 같아. 역시 이 바보 같은 감정의 이름은….
“그리 오래 산 것도 아니고, 분명 살다 보면 몇 번쯤은 일어나는 일이었겠지만요. 로한쌤을 만나고 처음으로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사랑에 빠졌어요. 올해는 정말 특이한 해라니까. 스탠드 능력도 생기고, 처음으로 먼저 반해보기도 하고, 별 관심도 없던 만화를 읽기 시작하고 짝사랑 상대와 이런 이야기도 나눠보고. 무엇도 나쁘지 않은 경험이지만.”
멈춰. 그 이상 말하면 나는 정말로 너를, 그렇게 생각했고 내뱉을 뻔했으나 만화가는 겨우 삼켰다. 이 마음은 아직 말로 하지 않으면 안 될 지경이 아니니까. 창작자로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입 밖에 내고 표현하는 것이야말로 그것을 진짜로 만드는 방법이라는 것을. 말해버려서 이 마음이 돌이킬 수 없는 진실이 되면, 나는 다시 상처받을 것이다.
사람은 다른 사람과 별별 이유로 멀어진다. 그냥 대화가 적어서, 만나지 않아서, 말이 통하지 않아서,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려서…. 소중한 누군가를 잃는 것을 감당하기엔 너무 어린 나이에 키시베 로한은 친구를 잃어버렸다. 그것이 너무 괴로워 그 기억을 잊어버리고도, 만화가는 소중한 사람을 잃는 게 싫어 소중한 사람을 만들지 않게 되었다. 퍽 슬픈 이야기이다. 그래도 그걸로 끝났다면 그저 평생 괴팍한 천재 만화가로서 나쁘지 않은 삶을 살다가 갔을 텐데.
“다른 사람도 각자의 방식으로 사랑하듯, 나는 나의 방식으로 사랑을 해요. 누군가는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쩔쩔매고, 누군가는 일부러 모질게 굴겠죠. 내 사랑은 그 사람이 내 일상에 들어오는 거예요. 두근거리며 설레지 않아도, 다정하게 속삭이지 않아도 모든 평범한 순간에 함께하는 거. 나는 지금까지 내 방식으로 선생님을 가장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만은 알아주면 좋겠어요."
그럼 오늘은 가볼게요. 멋대로 같이 있느라 집중 못하게 한 것 같으니까…. 지암은 그렇게 말하며 미련도 없이 자리를 정리했다. 책을 척척 집어넣는 짧은 시간 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말이 없었다. 그럼 다음에 또 봐요, 로한 선생님. 작업실 문이 찰칵 닫히고 방안에 정적이 맴돌았다.
그래, 이건 분명 나쁜 경험은 아닐 테다. 직접 체험한 것만을 그리는 로한으로서는 정말 더없이 귀중한 경험이었다. 처음으로, 만화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온종일 머릿속에 가득 차기 시작했기 때문에. 키시베 로한은 양손으로 마른세수를 하고는 그대로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긴 한숨이 지나가고 난 자리엔 옅은 열기와 답지 않게 발그레한 뺨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제길, 그렇게 말하고 가버리면 오히려 더 네 생각이 머리에서 전혀 떠나지 않잖아….’
이제 시작했을 뿐인 이 이야기는 정말로 평범하지도 않고, 남들은 공감도 못 할 이상한 풋사랑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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